참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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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작성일2020.07.21 조회1,060회 댓글0건본문
『전경』 권지 1장 11절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이와 같이 『전경』에는 동학에 관한 언급이 많다. 시대가 그러했고 상제님의 탄강지인 고부는 동학농민운동의 발원지로 동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하시면서 ‘참 동학’을 강조하셨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전경』의 동학 관련 구절을 좀 더 살펴보자.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
(교운 1장 9절)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十二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들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
(공사 2장 19절)
위의 구절을 보면 상제님께께서는 최제우로 하여금 제세대도를 펼 수 있게 하셨으나 그는 상제님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하여 당신께서 직접 강세하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학교도들이 주장한 보국안민은 그 실상이 후천의 일을 이야기한 것이었으나, 내심으로 당장의 왕후장상을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제님의 말씀처럼 동학에 연관되어 끌려가서 죽은 이가 수 만이었다. 그런데 동학에 참가한 모든 사람이 다 왕후장상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동학에 참가한 모두가 왕후장상을 꿈꾼 것이었다고 한다면 ‘동학’의 해원은 이미 끝난 것이고, 이런 사정이라면 ‘참 동학’이란 말씀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참 동학’이란 상제님의 말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동학농민 봉기, 난, 운동, 혁명
먼저 동학농민운동이다.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가 원인이 되어 동학의 접주였던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발생한 봉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농민운동 이외에도 동학난, 갑오농민혁명 등으로 일컬어진다. 당시의 기록은 이를 어디까지나 난(亂)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대를 경과하면서 사회 개혁을 위한 농민운동 그리고 최근에는 농민혁명으로까지 격상되었다.
동학농민의 봉기는 그 이전의 민란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19세기 조선은 가히 민란의 시대라 할 정도로 전국 각지의 민란이 빈발했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 일문의 독재와 삼정의 문란 그리고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해 조선의 국력이 현저하게 하락하였고 피지배층의 불만이 한계 상황을 돌파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민란은 최종적으로는 조정에서 파견한 관군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진압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의 봉기는 이전의 민란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동학농민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느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렇게 전라도 지역에서 정부의 공권력에 공백이 생기게 되고 각지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각 군현에 수령들이 있다고 해도 형식상의 목민관에 지나지 않았다. 전봉준은 금구, 원평을 근거지로 전라우도를 관할했고, 김개남은 남원을 근거로 하는 전라좌도를 관할하였다. 따라서 동학농민의 봉기를 단순한 사회 개혁 운동이 아닌 혁명으로까지 부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피지배층의 봉기를 민란, 반란, 폭동, 사태, 소요로 규정하고 그들의 무리를 비도(匪徒: 도둑 떼)로 매도하는 것은 위정자들의 일반적인 관행이라 할 수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조선 후기의 민란이 기존의 사회질서에 대한 반란은 분명하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죽이고 부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비슷한 사례로 동학농민의 봉기 이전에 가장 큰 민란인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다. 1811년 홍경래, 우군칙 등이 중심이 되어 평안도에서 일어난 이 농민반란은 약 5개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마지막 근거지인 정주성이 함락되고 난 이후에 성안을 살펴보니 관청과 사당 그리고 향교 등은 온전했다고 한다. 봉기의 주동자들과 그들의 행위를 사회질서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하층 계급의 소요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이다.
동학농민의 봉기에서도 그들이 내건 슬로건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양척왜(斥洋斥倭)’였다. ‘보국(輔國)’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충성을 다하여 나랏일을 도움’이라 한다.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사회질서에 반기를 든 이들이 내 걸 구호는 아닌 것이다. 게다가 외세 배격은 동학농민이 단순한 피지배층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물론 이를 두고 동학농민의 봉기가 최종적인 체제 전복에까지 이르지 않은 개혁요구였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의 봉기 이후에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숱한 봉기와 운동을 보면 우리나라의 시위가 다른 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세계가 놀란 것은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는 데에도 별 사고 없이 종료되었고 민주적 절차에 의해 정부가 교체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980년대 학생 시위에서 돌과 최루탄, 화염병이 뒤섞이는 상황이 발생해도 주변의 가게가 약탈당하였다는 소식은 없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시위가 곧 약탈과 방화 그리고 인명과 재산의 손실로 나타나는 다른 나라들의 시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준다.
조선 시대의 농민은 양반 지배계급에게 상놈으로 천시되고 철저한 수탈과 교화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고 외세 배격을 요구한 것을 볼 때 그들 스스로 나라의 주인임을 인식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과도한 폭력의 사용은 제어되었고 이것이 그 이후에도 연면히 이어져 온 것이 지난 촛불 시위에서도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동학과 관련된 사건들을 보면서 의아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동학에 참가한 이들의 변신이다. 이른바 일진회에 투항한 이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한국 근현대사가 아무리 복잡다단하다고 하지만 한때는 척양척왜를 부르짖은 사람들의 친일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다음의 장에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동학과 친일
보국안민과 척양척왜를 외친 사람들이 비록 일부라고 하지만 친일로까지 이어진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동학에 참여한 사람들이 한결같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 동학에 참가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어윤중(魚允中)의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864년 최제우가 혹세무민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을 펼치게 된다. 이 교조신원운동은 4차에 걸쳐 전라도 삼례역, 경복궁 광화문 앞, 보은 장내리에서 행하여졌는데 동학교도들은 교조 최제우의 원을 풀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관리들의 폭력 중지를 요구하였다. 이때 보은 집회에는 전국에서 2만의 교도가 모였는데 조정에서는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을 파견하여 이들을 다독이고자 했다. 그 어윤중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 당시 모인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1. 재주가 있으면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울분 속에 사는 사람
2. 탐관오리의 비행에 분노하여 민중을 위해 죽기를 결심한 사람
3. 외국이 우리의 이권을 빼앗음을 원통하게 생각하는 사람
4. 탐관오리에게 수탈당하고도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는 사람
5. 경향(京鄕)의 세도가에게 눌려 살아갈 수 없는 사람
6. 죄짓고 도망 다니던 사람
7. 영읍(營邑)의 관리로서 떠돌아다니던 사람
8. 농민이나 상인(商人)으로서 살아갈 길이 없는 사람
9. 그곳에 가면 잘살게 되리라는 풍문을 듣고 온 어리석은 사람
10. 빚에 쫓기는 사람
11. 천민의 몸으로서 신분 상승을 원하는 사람01
위를 보면 동학의 기치 아래에 모였다고는 하지만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민중을 위해 죽기를 결심한 사람부터 그곳에 가면 잘살게 되리라는 풍문을 듣고 온 사람, 천민의 몸으로 신분 상승을 원하는 사람까지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이 가운데 상제님께서는 차경석과 더불어 ‘왕후장상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이들’을 해원시켜 주신 것이다. 차경석은 지극한 성경신으로 상제님께서 칭찬하신 종도이지만 음양도수를 조정하실 때(공사 2장 16절) ‘열두 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다면서 자신의 야망을 드러냈었다. 차경석을 보면 결국 그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진로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동학농민 봉기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 가운데 어지러운 시대에 편승하여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고 했던 이들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요행히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또 다시 자신의 여망을 이루기 위해 움직였다. 일진회에 가담하고 끝내는 일제에 투항한 이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에게 동학은 하나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껍데기가 무엇이든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킬 도구가 된다면 무엇이라도 관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친일이라고 해도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킬 수만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상제님께서 언급하신 ‘왕후장상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상기에 언급된 어윤중이 분석한 동학교도 전부일 수는 없다. 특히나 ‘민중을 위해 죽기를 결심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들의 소망은 ‘왕후장상’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어윤중의 기록에서 언급된 많은 사람 가운데 ‘왕후장상’을 염원한 일부의 사람들을 차경석과 함께 해원 시켜주셨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동학에 가담하였지만 차경석과 함께 해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서 살펴보겠다.
참 동학과 전봉준
상제님께서 차경석과 달리 평가하신 인물이 있다. 그는 동학농민의 선두에 섰던 전봉준이다. 『전경』의 관련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전 명숙은 만고 명장이라. 백의한사로 일어나서 능히 천하를 움직였도다.
(공사 1장 34절)
- 상제께서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전 명숙과 최 수운의 원을 풀어주셨도다.
(공사 3장 2절)
- 우리의 일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공부이니라. 남이 잘 되고 남은 것만 차지하여도 되나니 전 명숙이 거사할 때에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인(賤人)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는 마음을 두었으므로 죽어서 잘 되어 조선 명부가 되었느니라.
(교법 1장 2절)
- 이것이 남조선 뱃길이니라. 혈식 천추 도덕 군자가 배를 몰고 전 명숙(全明淑)이 도사공이 되니라.
그 군자신(君子神)이 천추 혈식하여 만인의 추앙을 받음은 모두 일심에 있나니라. 그러므로 일심을 가진 자가 아니면 이 배를 타지 못하리라.
(예시 50절)
상제님께 전봉준과 같이 격찬을 받은 인물은 드물다. 그의 의기는 능히 천하를 움직일 만했기 때문에 사명기를 세워 그 원을 풀어주신 것이다. 또한 일심을 가진 자에게 지체 없이 베풀어 주리라 하신 말씀도 우선은 전봉준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밝혀 주시고 있다.
전봉준에 관한 기록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봉준이 관군에게 잡혀 법정에서 심문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전봉준 공초>를 보면 동학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문: 너는 고부군수로부터 피해를 입은 바가 많지 않았는데 무슨 뜻으로 거병했는가?
답: 세상살이가 날로 잘못되어가는 고로 개연히 한번 세상을 건져볼 뜻이 있었다.
문: 소위 동학이란 어떤 주의이며 어떤 도학인가?
답: 마음을 지켜 충효를 근본으로 삼음으로써 보국안민코자 하는 것이다.
문: 너 역시 동학을 몹시 좋아하는가?
답: 동학은 마음을 지키고 하늘을 공경하는 도이므로 나도 몹시 좋아한다.02
<공초>의 일부만 보더라도 전봉준은 앞서 ‘왕후장상’을 바란 이들과는 다른 마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그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봉준은 잘못되어 가는 세상을 건져 볼 생각으로 일어선 것이며 보국안민이 그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전봉준에게 동학이란 ‘마음을 지켜 충효를 근본으로 삼으로써 보국안민코자 하는 것’이며, ‘마음을 지키고 하늘을 공경하는 도’이다. 전봉준은 동학이 내건 슬로건과 자신의 생각이 조금도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이었기 때문에 앞장 선 것으로 그는 표리부동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상제님께서 ‘참동학’을 언급하신 것은 차경석과 같은 선천에서의 해원을 추구한 이들과는 결을 달리하는 전봉준,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지녔던 이들을 향한 후천 해원의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사회가 혼란해지면 그 혼란을 기회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동학농민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상제님의 평가는 참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상제님께서는 그들의 성공과 실패라던가 자질 혹은 실력 또는 여타의 모든 것을 다 물리치시고 오직 그 사람이 가진 마음을 보신 것이다.
『전경』에 “길화개길실(吉花開吉實), 흉화개흉실(凶花開凶實)”이라는 말이 있다. 꽃이 좋으면 그 열매도 좋은 것이고 꽃이 흉하면 그 열매도 흉한 것이다. 사람에게 적용하면 사람의 마음이 꽃인 셈이다. 마음의 꽃이 어떤가에 따라서 전봉준이 되기도 하고 차경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동학이 추구한 보국안민의 가치는 한때 유행한 슬로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이후에도 연면히 이어졌고 수도인들의 수칙에도 그 가치는 분명하게 들어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수칙 1. 국법을 준수하며 사회도덕을 준행하여 국리민복에 기여하여야 함이 그것이라 생각한다.
01 「聚語」, 『東學亂記錄 上』 p. 122, 1970 국사편찬위원회, 신복룡, 『전봉준 평전』 3판 2019, 도서출판 들녘 46쪽에서 재인용.
02 신복룡, 『전봉준 평전』 3판 2019, 도서출판 들녘, pp.337-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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