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鳳凰), 요순의 도가 펼쳐지면 출현하는 어진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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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22.06.23 조회1,955회 댓글0건본문
‘새 중의 왕은 봉황새요, 꽃 중의 왕은 모란이요, 백수의 왕은 호랑이다’는 말처럼 봉황은 모든 새의 우두머리로 여겨지며 한국인의 의식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길조로 등장한다. 예로부터 하늘이 내리는 최고의 상서(祥瑞)01로 여겨져 주로 궁궐벽화와 단청 등에서 찾을 수 있는 봉황은 도장 건축물과 벽화에도 깃들어 있다. 하지만 봉황은 현존하는 동물이 아닌 까닭에 대중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이 때문인지 과거 《대순소식》 24호02에서는 봉황의 특징만 간략하게 소개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수도인들이 도장 참배 때 도장 건축물의 단청과 벽화에서 접하게 되는 봉황의 모습과 특징에 중점을 두고 봉황에 부여된 상징적 의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요순(堯舜)의 도를 상징하는 상서(祥瑞)
봉황은 고대로부터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상서로운 동물로 일컬어지며 요순시대의 태평성대(太平聖代)와 성군의 덕치를 상징해왔다. 예로부터 요순은 가장 이상적 천자상(天子像)으로 하늘을 본받은 높고 위대한 성군으로 칭송되었고, 요순시대는 참다운 도가 펼쳐져 만민이 상생하는 이상향으로 여겨졌다. 어진 성군의 덕치로 나라가 태평하면 성군이 베푼 선정으로 말미암아 하늘이 상서를 내려 그 뜻을 칭송했는데, 이때 그 징표로서 출현한 상서가 봉황이다. 이런 연고로 봉황에게 부여된 상징성 중 으뜸은 요순의 도(道)와 상서다.
성군의 덕치로 태평성대가 실현된 지상낙원에 홀연히 나타난다는 봉황에 대한 기록은 문헌에서도 찾을 수 있다. 중국 고대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는 “단혈산(丹穴山)에 봉황이 사는데, 이 새는 길조와 인애(仁愛)의 상징이며, 사람 사는 곳에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라는 기록이 있다.03 봉황에 부여된 태평성대의 상징성은 『송하견서(送何堅序)』와 『죽서기년(竹書紀年)』에도 전해진다. 중국 당나라 때 문장가 한유(韓愈:768-824)는 『송하견서』에서 “새 중에 봉황이 있는데,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나타난다”라고 했고, 전국시대 역사서 『죽서기년』에는 봉황이 황제헌원과 요(堯)ㆍ순(舜)ㆍ주(周) 임금 때 출현하여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04
중국의 고(古)문헌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이런 봉황의 상징성을 찾을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봉황은 더할 수 없는 훌륭한 정치가 일어날 때 ‘임금의 어진 정치에 하늘이 감응해서 나타난 길한 징조[서응(瑞應)]’인데, 이는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일 05을 상징하며, 순(舜)임금과 문왕(文王) 같은 덕이 있어야만 봉황새가 와서 춤추는 것06이라고 했다. 이는 예로부터 봉황이 요순시대처럼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 나타난다는 믿음에 연유한 것이다. 조선 시대 임금이 추구해 마지않았던 것도 만백성이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며 태평성대를 누렸던 요순의 정치를 이 땅에 펼치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세종은 나라에 공식적인 연회가 있을 때면 왕가의 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송축가(頌祝歌)를 지어 불렀는데, 그 가사를 봉황음(鳳凰吟)이라고 하였다. 봉황음은 조선 세종 때 윤회(尹淮:1380-1436)07가 지은 것인데, 봉황음에는 성왕(聖王)의 덕치로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가 실현되기를 기원했던 선조들의 바람이 노랫말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당가 천장부의 봉황, 『창덕궁 인정전(昌德宮 仁政澱) 실측조사보고서』 p.29. 문화재관리국, 1998.
▲ 창경궁 명정전(明政殿) 당가 천장부의 봉황, 출처: 창경궁 공식 트윗터, 2018.11.30
이런 봉황의 상징성은 조선 시대 궁궐의 정전(正殿)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정전은 궁궐에서 으뜸가는 집으로 임금이 중신들과 함께 나랏일을 논의하고 조회(朝會)를 하던 공간이다. 궁궐 정전 이름마다 들어 있는 정(政)자는 바를 정의 의미도 있으니, 이는 임금이 자신을 채찍질하여 바른 정치의 길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표현인데, 이곳에 봉황이 새겨진 것도 바름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요순시대와 같은 성군의 덕치를 펼치려는 정치적 이상이 반영되어 있다. 08 실제로 가장 오래된 조선 시대 궁궐 건물인 창덕궁 인정전(仁政殿)과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의 당가(唐家)09 천장에는 두 마리의 봉황 목조각이 장식되어 요순의 도가 펼쳐져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염원한 임금들의 바람을 엿볼 수 있다.
오덕(五德)을 갖춘 어진 새, 인조(仁鳥)로 불리다
봉황은 지절(志節)이 굳고 품위를 지키는 어진 새로도 알려져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이 새는 신조(神鳥)로서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 사해(四海) 밖을 비상하다가 곤륜산(崑崙山)을 넘어서 황하의 지주(砥柱)10에서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서 깃털을 씻은 뒤 해가 저물면 풍혈(風穴)11에서 잠을 잔다고 한다.12 또한, 봉황은 오동나무에만 깃들며 살생을 싫어하여 살아있는 벌레 대신 대나무 열매 씨[죽실(竹實)]를 먹고 풀조차 밟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봉황의 이러한 특성은 “봉황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는다.”, “봉은 굶주려도 좁쌀은 쪼지 않는다.”라는 속담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는 봉황이 가진 성질을 절개가 굳고 청렴하고 고귀한 성인ㆍ군자의 성품으로 승화시킨 것이다.14 궁중에서는 봉황이 가진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을 왕비에 비유하여 왕비가 거처하는 대조전의 벽면과 문고리 및 비녀[봉잠:鳳簪]에 봉황문양을 활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그동안 왕실의 상징으로 왕족만 쓰던 봉황 문양이 민간에서도 그림 소재로 쓰이게 되었다. 청렴, 절개, 군자 등의 상징성을 지닌 봉황은 주로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관련된 문자를 그림 형태로 표현한 문자도(文字圖)에 그려져 선비들의 사랑방이나 서재 한편에 자리 잡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예로부터 봉황은 오덕(五德)을 갖춘 서수(瑞獸)로도 여겨졌다. 그 까닭은 봉황의 몸에 깃든 다섯 가지 무늬 때문이다. 봉황의 무늬는 각기 상징하는 바가 있는데, 머리 무늬는 덕(德), 날개 무늬는 의(義), 등 무늬는 예(禮), 가슴 무늬는 인(仁), 배 무늬는 신(信)을 나타낸다.15 이처럼 봉황에 부여된 성품과 덕성은 인간이 갖추고 실천해야 할 윤리도덕과 도리를 상징하기에 사람들로부터 어진 새로 불리며 인조(仁鳥)로 자리매김하였다.
도장 건축물에 깃든 봉황의 모습과 특징
우리 도장 곳곳의 단청과 벽화에서도 봉황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여주본부도장과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의 단청부 익공(翼工)16 위에는 아름답게 채색된 봉황 머리 모양의 봉두(鳳頭)17가 외부로 돌출된 단청의 보머리 부분에 줄지어 조각되어 있다. 도장 건축물 단청부에서 봉황이 내려앉아 있는 익공은 그 모양이 마치 소의 혀 모양을 닮았다 하여 쇠서(牛舌)로도 불린다. 쇠서가 위쪽을 향해 치켜 올라간 것을 앙서형(仰舌形) 쇠서, 아래로 향해 뻗은 것을 수서형(垂舌形) 쇠서라고 일컫는다.
봉두가 몇 단의 쇠서 위에 조각되었는가에 따라 건축물의 위계도 가늠할 수 있다. 쇠서가 1단인 건축보다 2단으로 구성된 건축의 위계가 훨씬 높은데, 궁궐의 경우 중요 전각의 공포를 2단의 쇠서로 구성한 경우 부속 행각의 쇠서는 1단으로 설치하여 건축물의 위계에 차이를 두었다.18
여주본부도장의 경우, 부속 건물인 생활관 형태의 건축물19에는 봉황이 한 개의 앙서형 쇠서 위에 내려앉아 있지만, 일각문과 대순성전에는 두 개의 앙서형 쇠서 위에 조각되어 있다. 아울러 영대가 위치하여 도장에서 가장 엄숙하고 경건한 정내 본전에는 가장 높은 5단으로 층층이 짜인 쇠서 위에 봉황이 깃들어 있다. 이는 도장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영대에 최상의 격이 갖추어져 있음을 뜻한다.
▲ 여주본부도장 본전의 봉두와 쇠서(사진: 본전 그물망 작업, 2013.4.26)
본전에는 5단으로 구성된 쇠서에 각기 다른 색상의 연꽃 문양이 봉황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고, 그 위에 봉황 머리 모양의 봉두가 줄지어 자리하여 수려함과 웅장함을 더한다. 이처럼 건축물 단청에 봉황이 조각될 경우 쇠서 부분에는 대부분 연꽃이 그려진다. 그 까닭은 연꽃이 세속에 물들지 않는 군자(君子)와 참다운 진리(眞理)를 상징하여 봉황과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때 봉황과 함께 그려지는 연꽃의 꽃잎 수는 일반적으로 3엽에서 10엽 이내로 그려진다.20 여주본부도장인 경우 대순회관은 6엽, 신축회관 8엽, 영대 본전에는 7엽으로 그려져 있다. 단, 대순성전에는 5엽과 3엽 두 가지 형태의 연꽃이 봉황과 함께 그려져 있는데, 5엽은 활짝 핀 형태로 그려져 있고, 3엽은 꽃잎 끝이 안쪽으로 오므려진 파련(波蓮) 형태인 것이 특징이다.
그런가 하면 여주본부도장에 그려진 천장 벽화와 금강산토성수련도장 포정문 벽화에는 봉황이 날개를 펼친 채 머물 듯 날아오르는 모습도 보인다. 봉황이 나는 모습을 봉상(鳳翔)21이라고 하는데, 둥글게 원을 그리듯 빙빙 돌며 봉상하는 상(翔)자에 포함된 ‘양(羊)’은 곧 상서로움을 의미하는 상(祥)으로 최상의 상서를 상징한다.22 상서는 하늘이 내려주는 길조(吉鳥)이기에 개인이나 가족의 안녕과 복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길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23 실제로도 봉황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로부터 성군이 출현하여 나라가 태평하면 홀연히 나타나는 길조로 여겨져 최고의 상서를 상징하는 새이다.
▲ 금강산토성수련도장 포정문 천정 봉황
한편, 금강산토성수련도장의 포정문과 여주본부도장 본전에 그려진 봉황 벽화는 단봉(團鳳) 형식의 벽화이다. 단봉(團鳳)이란 둥글 단(團)이라는 한자에서 보이듯 원을 그리듯 둥근 형태로 그려진 봉황을 일컫는다. 이외에도 봉황 벽화는 형식에 따라서 다양하게 구분된다. 예컨대, 봉황이 용과 함께 그려지면 용봉정상(龍鳳呈祥), 기린과 함께 화폭에 담기면 봉린정상(鳳麟呈祥), 두 마리의 봉황 벽화는 쌍봉도(雙鳳圖), 다섯 마리는 오봉도(五鳳圖), 여러 마리의 봉황이 무리 지어 있는 경우 군봉도(群鳳圖)로 불린다.24
이 가운데 도장에서 찾을 수 있는 봉황 벽화의 형식에는 앞에서 설명한 단봉 형식 이외에도 암수 한 쌍이 그려진 쌍봉도(雙鳳圖)도 있다. 여주본부도장 본전 1층과 정각원 2층에 그려진 봉황이 쌍봉 형식의 봉황 벽화에 해당한다.
이곳의 천장부에 그려진 봉황도는 암수 한 쌍이 긴 꼬리를 휘날리며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두 마리의 봉황이 부채 같은 두 날개를 활짝 펼친 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두 마리의 암수 한 쌍이 함께 담긴 쌍봉도에서 수컷인 봉은 양(陽)을 상징하고, 암컷인 황은 음(陰)을 상징하는데, 여기에는 음양화합과 조화의 이치가 담겨있다.25
그런가 하면 봉황은 색에 따라 종을 나누어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봉황 가운데 몸이 대체로 푸른색을 많이 띤 것은 난(鸞), 붉은색은 봉(鳳), 자주색은 악작(鸑鷟), 황색은 원추(鵷雛), 흰색을 많이 띠고 있는 것은 곡(鵠)이다.26 이렇듯 봉황은 몸의 중심 색이 어떤 색을 띠고 있는가에 따라 세분되기도 하지만, 모든 종류의 봉황을 합쳐 봉가족(鳳家族)으로 부르기도 한다.
▲ 여주본부도장 본전 1층 천장부의 봉황
▲ 정심원 2층 벽화에 그려진 봉황
우리 도장을 살펴보면, 금강산토성수련도장 포정문에 그려진 단봉 형식의 봉황은 몸의 중심 색이 자색으로 악작(鸑鷟)에 가깝다. 아울러 여주본부도장 본전과 정심원 2층에 그려진 쌍문도 형식의 봉황은 몸의 중심 색이 자색과 청색이므로 각각 악작과 난(鸞)과의 봉황에 속한다.
한편, 도장에 깃든 봉황의 모습을 교화할 때 간혹 주작과 봉황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공작처럼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닌 까닭에 옛 문헌이나 벽화를 눈여겨보지 않는 한 여간해서는 두 신조의 모습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주조(朱鳥), 주오(朱烏), 적오(赤烏)로도 불리는 주작(朱雀)의 경우 한자 표기에 붉을 주(朱)와 붉을 적(赤)자가 사용된 것처럼 머리부터 꼬리까지 몸 전체가 붉은색을 띤다. 하지만 봉황은 오채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봉황의 오채색은 오행을 색으로 나타낸 오방색과 같다. 그래서 봉황은 오채조로도 불리고, 봉황이 지닌 오채색은 때때로 오방색에 빗대어져 봉황이 오행의 이치까지 갖춘 것으로 여겨왔다.
봉황과 주작은 색상뿐만 아니라 몸을 감싸고 있는 털의 질감과 벽화를 통해 느끼는 기상도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도장의 정각원 2층 벽화에 그려진 주작은 다소 거칠고 날카롭게 채색되어 용맹스러운 기상이 엿보인다. 반면에 도장 벽화에 그려진 봉황은 부드럽고 단아하게 채색되어 고결하고 품위 있는 지조가 묻어난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삼국시대까지는 봉황이 삼족오(三足烏)와 현조(玄鳥), 주작의 형태로도 표현되어 지금의 형태와는 다르게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고려 시대부터는 전대에 나타났던 주작 형태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현재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꼬리가 길고 큰 날개를 가진 대조(大鳥) 형태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도장에서 찾을 수 있는 봉황의 모습 가운데 정심원 2층에 그려진 봉황 또한 도장에 깃든 여타의 봉황과는 다르게 가슴부위가 강조되어 앞으로 돌출되어 있고 몸을 뒤덮고 있는 털의 질감도 주작처럼 다소 거칠게 표현되어 있으며 벽화에 구름을 그려 넣지 않은 게 특징적이다.
▲ 정각원 2층 벽화에 그려진 주작
이렇듯 도장에 많은 봉황이 그려져 있는 것을 지금까지 봉황이 상징했던 요순의 도, 태평성대, 오덕 등과의 관계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벽화와 단청 이외에 봉황을 상징하는 중요한 조형물이 도장 정내 청계탑 뒤에 자리한 돌병풍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돌병풍에는 상제님께서 남겨주신 여러 글과 함께 동곡약방 남쪽 기둥에 남겨놓으신 친필이 있다. 이 친필은 『전경』의 제일 첫 장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도전님께서는 이 친필을 봉황 봉(鳳)이라 알려주시며 “상제님께서 봉(鳳) 자를 친필하신 뜻도 조을(鳥乙)을 밝혀놓으심이라.”27라고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는 동곡약방에서 대두목 공사를 행하시고 봉(鳳) 자를 동곡약방의 남쪽 기둥에 친필로 새겨 놓으신 것이다.
도전님께서 봉황 봉(鳳) 자가 조을(鳥乙)임을 밝혀주셨으므로 봉황이 상징하는 것은 조을(鳥乙)이 되고, 조(鳥)는 조(趙)와 음이 같으니 조을(鳥乙)이란 조을(趙乙)이다. 결국, 상제님께서는 봉황 봉(鳳) 자로써 당신의 뒤를 이어 도를 펼칠 진주(眞主)가 조(趙) 씨로서 을미생이라는 것을 알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상제님의 대순진리에서 봉황은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을 상징함을 알 수 있다.28 도장에 무수히 그려져 있는 봉황에는 이렇듯 하늘이 감추어둔 연원과 종통의 이치가 내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도(道)가 있는 곳에 출현하고 윤리도덕과 연관되어 오덕(五德)을 상징해온 봉황이 15신위와 천지신명이 모셔진 성스러운 도장에 자리하며 고귀함을 더하는 것은 태평성대와 삼강오륜이 실현된 어진 세상과 관련되어 있지만, 더욱 깊게는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의 진법에 의해 지상천국이 건설됨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상생의 도가 실현되면 하늘에 줄지어 나타나는 어진 새 봉황. 도장에 깃든 봉황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땅에 실현될 지상낙원을 그려본다.
01 경사롭고 길한 징조.
02 봉황(鳳凰)에 대하여.
03 예태일, 전발평 편저, 서경호, 김영지 역, 『산해경』 (서울: 안티쿠스, 2008), p.23.
04 「봉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05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7월 19일 계해 2번째 기사, “竊觀至治之興, 必致貞符之見。鳳儀著於虞史…”.
06 『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2월 22일 정유 3번째 기사, “上有舜、文之德, 然後鳳凰來儀”.
07 조선전기 예문관제학, 대제학,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08 《월간문화재》 2011년 9월호 정전당가 참조.
09 궁전 안의 옥좌 위나 법당의 불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으로 닫집이라고도 함.
10 황하(黃河)강 중류에 있는 산 이름. 산의 모습이 물속에 기둥처럼 솟아 있어 지주라고 부르게 되었다.
11 땅속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산기슭에 뚫린 구멍.
12 『說文解字注』 (중국: 상해고적출판사, 1981), p.148 참조 『說文解字』 <鳥部>; “神鳥也…出於東方君子之國, 翺翔四海之外, 過崐崘, 飲砥柱, 濯羽弱水, 莫宿風穴. 見則天下大安寕.”
13 봉황, 한국민화센터(http://minhwacenter.com); 이명숙, 「한국 공예품에 표현된 봉황문양 연구」, 『한국 의상디자인학회지』 14 (2012), p.177 참조; 이재은, 「19세기 궁중 서수도의 양상과 특징」, 『미술사학연구』 292 (2016), p.91 참조.
14 「봉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봉황」, 한국민화센터 참조; 한나래, 「고려왕릉 출토 봉황문 장식의 상징과 강화 능내리 석실분의 피장자 검토」, 『지역과 역사』 45 (2010), p.94 참조.
15 「최상의 상서와 길상의 화신 봉황」,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16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로 쇠서(牛舌), 또는 촛가지라고도 함.
17 전각(殿閣)의 기둥머리에 봉황의 머리 모양으로 새겨서 대는 꾸밈새로 봉두각(鳳頭刻)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림.
18 「익공」,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참조.
19 신축회관, 대순회관, 관리동, A동, B동.
20 오지혜, 이인성, 「단청의 연화문을 활용한 파티웨어 디자인 개발」, 『한국의류학회지』 35 (2011), p.964.
21 봉황이 나는 모습은 봉비(鳳飛)라 하지 않고 봉상(鳳翔)이라고 함.
22 《월간문화재》 2011년 9월호 정전당가 참조.
23 이재은, 「19세기 궁중 서수도의 양상과 특징」, 『미술사학연구』 292 (2016), p.84.
24 이명숙, 「한국 공예품에 표현된 봉황문양 연구」, 『한국 의상디자인학회지』 14 (2012), p.178; 한국민화센터(http://minhwacenter.com) 「봉황」 참조.
25 우야오, 박용진, 박진숙, 「중국 전통 봉황 문양을 활용한 시각적 상징의 조형성 연구」, 『기초조형학연구』 18 (2017), pp.192-195 참조.
26 왕대유, 『용봉문화원류』 (서울: 동문선, 2002), p.56, 59, 148 참조.
27 「도전님 훈시」(1982. 음4. 24, 윤4. 26).
28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대순회보》 168호, 「을미년(乙未年) 三」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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