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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칙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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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10 조회2,3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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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자기는 도인의 옥조니,

양심을 속임과 혹세무민하는

언행과 비리괴려를 엄금함.

글 교무부

 

  우리 사회에는 인생을 보람 있게 잘 살고 남에게 자신의 가치를 올바로 인정받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보다는 남을 속이고 부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은 부(富)를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은 후천세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지금, 선천의 상극적이고 조화롭지 못한 여운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에서 어려움에 처할 때 일시적으로 세속적인 풍요를 부러워할 수도 있지만, 이는 인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아닌 것이다. 그 목표는 부정과 편법에 의한 부의 축적과 권력의 소유가 아니라, 양심(良心)에 의한 참다운 인격과 도통(道通)이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 도통을 이루기 위해서는 항상 무자기(無自欺)가 그 바탕이 되어야 한다. 무자기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 달리 표현하면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하늘의 품성인 양심(良心)을 간직하는 것이다. 양심은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해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잘되게 하려는 마음이다. 그래서 양심이 있으면 사욕은 발동하지 않기 때문에, 편벽(偏)됨이나 사사(私邪)됨이 있을 수 없다.

이와 반대로 자기 자신을 속이려는 마음은 사욕(私慾)에 의해 발생하는데, 사욕은 대개 물욕(物慾)이 그 원인이 된다. 사욕은 인간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양심을 마비시키고 모든 죄악(罪惡)을 낳게 한다. 결국 인간의 모든 죄악(罪惡)의 근원(根源)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에, 일체의 죄악(罪惡)을 근절(根絶)하기 위해서는 무자기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도(道)에서 무자기를 도인(道人)들이 갖추어야 할 아주 중요한 조목(條目), 즉 옥조(玉條)라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무자기를 가로 막는 장애물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주로 물욕(物慾)에 의한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일찍이 “돈이란 것은 순환지리로 생겨 쓰는 물건이니라. 억지로 구하여 쓸 것은 못되나니 백년 탐물(百年貪物)이 일조진(一朝塵)이라.”(교법 1장 64절)고 하셨다. 돌고 도는 것이 돈의 이치(理致)이다. 돈은 억지로 구하여 쓸 것은 못된다고 하셨듯이, 양심(良心)을 저버리고 부정과 편법을 동원하여 돈을 벌었다고 즐거워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쉽게 얻은 재물은 하루아침에 티끌이 될 수 있으며, 그 정도가 지나치면 자신의 운명까지도 낭패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노력으로 어렵게 쌓은 재물이라야 가치 있게 사용할 수 있고,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순수한 노력보다는 쉽게 돈을 벌어 물질적 풍요를 누리려는 사람들이 많다. 검은 유혹에 빠지면 그 단맛에 주변의 시선과 자신의 체면에 무감각해져 이성을 상실하게 된다. 불나방이 불이 좋아 불을 찾다가 불에 타죽듯이,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망치게 될 것은 뻔한 일인데도 말이다. 인간은 항상 도(道)를 생각하지 않으면, 물욕에 취약하여 허망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무자기의 상실은 명예와 직위에 대한 탐욕을 불러온다. 명예나 권위에 대한 집착은 사욕(私慾)의 하나로서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삶의 의지를 저해한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구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 경쟁사회에서 이러한 욕구는 서로의 발전을 위한 촉진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무능한 줄 알면서도 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신명은 탐내어 부당한 자리에 앉거나 일들을 편벽되게 처사하는 자들의 덜미를 쳐서 물리치나니라. 자리를 탐내지 말며 편벽된 처사를 삼가하고 덕을 닦기를 힘쓰고 마음을 올바르게 가지라. 신명들이 자리를 정하여 서로 받들어 앉히리라.”(교법 1장 29절)고 말씀하신 바 있으시다.

  우리 도(道)에서는 항상 자신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대체로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부족한 점을 채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서 오히려 권위를 더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결점을 권위로써 막아보려는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구성원을 속이는 행위로서, 인격과 양심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한 집단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바로 알아서 내가 설자리인가 아닌가를 분별하고, 자신에게 일이 주어지면 책임을 다하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그것을 보완하려는 노력, 이것이 무자기(無自欺)의 실천이다.

또 하나의 무자기의 장애물은 예(禮)를 앞세운 위선적(僞善的)인 행동이다. 우리 도(道)에서 예(禮)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일생 동안 움직일 때나, 정지할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起居動靜]를 가리지 않고 항상 정도를 넘는 일이 없이,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을 이른다고 정의하고 있다.(『대순지침』, 68쪽 참조)

  그런데 남이 보는 앞에서는 예의 바른 사람처럼 땅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인사를 하다가, 뒤돌아서면 악의적(惡意的)인 말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때로는 말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남을 비방하기도 한다. 이런 위선적인 행위는 신뢰감을 상실케 하여 남에게 소외당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예(禮)란 단순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진실과 공경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예의 바른 행동은 상대방의 기분을 전환시켜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항상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다. 또 자신의 잘못을 반성(反省)하여 개선(改善)하려는 노력도 중요하다. 그렇지 않고 그 잘못을 감추려고 하거나 합리화시키려고 한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고 또 다른 거짓말을 낳아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까지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개는 사람을 물고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행동하고, 고양이는 생선을 몰래 먹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자기 자신을 속이고도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양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 중에도 개나 고양이처럼 잘못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남을 속이는데 만성이 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고 병들게 하는 암적인 존재이다. 암세포는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면 건강한 세포로 전이(轉移)되듯이, 암적인 존재는 선량한 사람까지 자신의 굴레에 가둬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우리 도인(道人)들은 이것이 자기 자신을 속인 죄뿐만 아니라, 불의(不義)로써 남을 유인한 죄를 범하는 것이고, 신(神)을 속이는 행위로서 중벌(重罰)을 면치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윗사람이나 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아랫사람이나 약한 사람들에게 비양심적인 일에 동조하도록 강요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잘못을 바로 잡아주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충고(忠告)해 주고, 양심(良心)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이 윗사람이나 강자(强者)로서 해야 할 도리(道理)일 것이다. 이렇게 해야 상호 신뢰가 쌓이고 사회가 바로 서고 도(道)가 바로 설 수 있다.

  특히 상제님의 진리를 전함에 있어 무자기의 실천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말을 꾸며서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지 말아야 하며, 함부로 운수나 도통에 시한부를 운운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자멸행위이며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행위로써 일반사람들에게 사이비(似而非) 종교로 오인(誤認)받을 수도 있다. 도리(道理)에 위배되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유포하여 도인의 본분을 상실하거나 덕화(德化)를 손상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대순지침』, 22-24쪽 참조) 어디까지나 상제님의 진리를 『전경』 말씀을 중심으로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한다. 이것이 무자기의 실천이요, 우리를 현재 이 자리에 있게 해 주신 상제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무자기(無自欺)는 인간과 사회를 정화(淨化)하여 개혁할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나부터 실천하면 사회가 변하고 세계가 달라진다. 또한 무자기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소원인 도통(道通)을 이루게 해주는 원천(源泉)이기도 하다.

  상제님께서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 서신(西神)이 사명하여 만유를 제재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 만물이 가을바람에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성숙도 되는 것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오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그러므로 신의 위엄을 떨쳐 불의를 숙청하기도 하며 혹은 인애를 베풀어 의로운 사람을 돕나니 복을 구하는 자와 삶을 구하는 자는 힘쓸지어다.”(예시 30절)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모든 일을 하늘이 알고 신명(神明)이 알고 있다. 무자기(無自欺)의 실천 없이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 거짓된 자는 영원히 죽지만 참된 자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인 영생(永生)과 도통(道通)도 무자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순회보》 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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